신륵사
위 치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되었고 승려 나옹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후 고려 우왕 2년(1376) 크게 중창된 유서 깊은 절이다.
신륵사는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근.현대사에 있어 신륵사의 활동은 크게 알려지지 않으나, 1925년 열반당 14칸을 새로 짓고,
1929년 강성인스님이 주지 재임시 김인주가 화주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신륵사는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오래된 전통 사찰로서,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절은 강가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성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 일원은 1977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주요문화재 :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소속단체 : 통도사(通度寺)
▶ 법명 : 혜근(惠勤, 慧勤)
▶ 속명 : _
▶ 호 : 나옹(懶翁)
▶ 국가하사명 : 왕사(王師)
스님은 법명을 혜근(惠勤:慧勤), 처음 이름을 원혜(元慧)라 했으며 법호를 나옹,머무는 곳을 강월헌(江月軒)이라 불렀다.
성씨는 아(牙)씨로 경북 영덕군 영해 사람이다.
아버지는 선관서령(饍官暑令)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며 어머니는 정(鄭)씨 이다.
어머니의 꿈에 황금빛 새 한마리가 날아와 머리를 쪼으며 알을 떨어 뜨렸는데 그것이 품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 태기를 느껴
고려 충숙왕 7년(1320)1월15일 나옹을 낳았다.
우왕 2년(1376)5월15일 오전10시경 경북 밀양 영원사로 가던도중 신륵사에서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 57세,법랍 37이었다.
여주 신륵사와 나옹 화상(懶翁 和尙)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神勒寺)
고려말 인도와 중국의 조사선맥(祖師禪脈)을 이어와 부패한
고려 불교를 일으켜 세우려다 간 나옹 혜근(懶翁 慧勤)스님이
입적하고 다비한 절이다.
나옹 스님은 茶와 禪 차삼매(茶三昧) 선삼매(禪三昧) 茶禪一如
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간 차인이었다.
인도 108대 조사인 중국의 지공선사(指空禪師)로부터 한 잔의
차로 법을 전해 받았다. 지공선사 뿐 아니라 중국 임제종의
종통을 이어 일문을 이루고 있던 평산선사(平山禪師)로 부터도
인가를 받고 돌아와 차 한잔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거목이었다.
靑山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스님의 불교가사로 널리 알려진 이 詩는 수 많은 불교 신자
들이 즐겨 암송하던 것으로 몇 년 전에는 노래로 까지
만들어져 애창되기도 했다. 茶와 禪의 경계가 무엇인지
茶人들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차나 한잔 들고가게나(喫茶去)”는 차와 선이 한 경지임을
말해주는 당나라때 조주(趙州)스님의 유명한 話頭이다.
奉喫師茶了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起禮印禮三 일어나서 세 번 절을 하나니
只這眞消息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從古至于今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나옹 스님은 스승인 지공선사로부터 법을 받고 이 게송(偈頌)
을 지어 올렸다. 언제나 차 한잔으로 법을 얘기 했다.
20년을 중국 땅에서 공부한 나옹은 지공법사가 자신의 법의와
불자 그리고 법서를 전해주어 자신의 불법을 이어 받을 인도
109대 조사로 인가하니 나옹 스님은 인도와 중국의 조사선맥
을 한몸에 가지게 된다. 나옹은 이 모든 것들을 챙겨 가지고
귀국하여 오대산 북대와 금강산 등지를 돌며 더욱 정진한다.
공민왕은 개경으로 불러 왕사에 봉하고 조계종사의 자격으로
송광사에 주석케 한다.
스승인 지공선사가 입적하며 나옹에게 남긴 정골사리와
가사를 전해받아 스승의 뜻을 이루기 위해 회암사에 대가람을
건립하려 중창 불사를 일으킨다.
2백60간여의 대규모 사원을 낙성하여 서울과 지방의 선비와
아낙네들이 밤낮으로 왕래하여 생업을 폐지할 지경이었다.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밀양 영원사로 강제 이주
당한다. 스님이 회암사를 떠나 밀양으로 향하던중 제자들이
살고있는 여주 신륵사에서 발길을 멈추고 5월 15일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가 바위 언덕에 앉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열반에 든다.
입적한 그 바위에서 다비를 하고 그 자리에
3층석탑을 기념비로 세웠다. 지금의 석탑이 바로 그 탑이다
나옹 스님의 제자중 한사람이 무학대사(無學大師)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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