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산사

◆사천시 곤명면,,,다솔사(11/10)

삼무강천 2012. 11. 12. 12:47

 

 

 

 

 

 

 

 

 

 

 

 

 

 

 

 

 

 

 

 

 

'茶道Teaism'와 효당 최범술

[曉堂 崔凡述 :1904년 5월 26일 사천 ~ 1979년 7월 10일]

-약력-

  • 일본 대정대학 예과 수료
  •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 졸업
  • 조선불교중앙총무부장
  • 재단법인 불교중앙교단 이사
  • 재단법인 가야총림 이사
  • 국민대학 [國民大學校],이사장
  • 1948年 5月 10日 : 제헌 국회의원[경남 사천]

-다솔사-

20世期 以後, 다솔사[多率寺]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이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정치인으로,

교육자로,

학자로 이름을 크게 떨쳤던 그의 출가도량이 바로 이곳 다솔사였던 것이다.

그의 영향으로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지 역할을 하였으며,

1960年代 以後에는 이 곳을 중심으로 한국 차문화의 연구와 보급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다솔사는 마치 茶'의 성지와도 같은 위상을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다솔사: 055-853-0283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 86번지

효당은 1904年 경상남도 사천군 서표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종호[崔鍾浩],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4남 3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환[英煥], 당호는 금봉[錦峰]이었고 효당은 그의 법호였다.

그는 1910年 고향의 사립학교인 개진학교를 입학하였지만,

在學中 일본인 교사 배척과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以後 1915年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으며,

졸업 以後, 당숙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사서를 배우다가,

부친과 함께 선대 조상을 위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다솔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효당은 다솔사의 스님이 읽는 경전소리를 듣고 출가의 발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며,

1917年 그의 나이 14歲에 부모의 승낙을 받아 다솔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入山 後에는 염불을 배우다 곧 해인사의 지방학림에 入學하였으며,

환경[幻鏡] 스님을 은사로 수계하였다.

*陜川海印寺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전화: 055-934-3000*

1919年 3 ·1運動이 일어나자 효당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의 등사 책임자로 맹활약하였다.

그는 대구에 가서 3,000'여 매에 달하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으며,

이를 대구 ·경주 ·양산 등지로 배포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합천읍내의 장날을 이용하여 일제의 우체국,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곤양헌병분견대에 끌려가 야만스러운 폭행을 당하였고,

以後 진주검사국으로 끌려갔으나, 만 15歲가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以後 효당은 해인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다솔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922年 6月,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원, 엿장수 등 갖은 고생을 다한 것으로 傳해진다.

그러한 와중에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박렬[朴烈]과 박흥곤[朴興坤] ·육홍균[陸洪均]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과 함께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고,

박렬의 일본천황 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해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다시 일제에게 체포되어 8個月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 以後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는데,

1923年 4月 일련종 입정중학교에 편입학,

1926年 물리학교 입학,

1927年 대정대학 예과 입학,

1929年 봄 대정대학 불교과에 정식 입학하는 등의 과정을 거쳤다

효당은 학업을 하면서 재일불교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年 4月 재일조선불교청년회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동경 유학생들을 결속하여 불교와 일반 철학을 연구하는 삼장학회[三藏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불교청년운동의 재조직의 일환으로 1931年 3月에 등장한 조선불교청년동맹 동경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효당은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단체였던 만당[卍黨]의 조직과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만당은 불교청년운동의 지하 단체였지만

불교의 자주화를 기하면서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0年 5月 무렵에 결성되었다.

단체의 성격상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그가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던 사실은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1933年 2月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한 효당은

졸업 직후에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명성여중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의 효당은 다솔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의 재정비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특히 당시 운동가들 사이에 있었던 내분을 수습하는 일과

만해, 김법린 등의 주요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다솔사는 불교계 지도자와 민족진영 인사들의 후원처,

즉 배일과 항일의 근거지가 되기에 이른다.

항일운동의 거점지이자 현대 차문화의 산실, 다솔사

효당은 만당의 발각으로 인해 1938年 8月 또다시 진주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以後 해방공간의 불교교단에서 총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48年에는 사천 ·삼천포 지역에 출마하여 제헌국회위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해방 以後 교육에 對한 그의 열정은 계속되어

국민대학[1947年],

해인중고등학교[1951年],

해인대학[1952年]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0年 以後에는 다솔사에 머물면서 원효학연구와 茶道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한국의 茶道*는 한국 최초의 茶道 관련 개론서라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독특한 제다법으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전수시킨 점이라든가,

한국 최초 차동호인들의 모임인 ‘한국차도회’를 전국적으로 망라 ·발족시켜

오늘날 여러 차회[茶會]'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는 점 등에서

韓國 茶文化의 현대화에 끼친 공적을 잘 살필 수 있다.

-최범술의 동방학지-

차를 대중화하는 데 효당 최범술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다승들이 머물렀던 경남 사천의 다솔사

[신라 지증왕 4年인 503年에 승려 연기[緣起]가 창립했다는 영악사:靈岳寺'가 -陀率寺'로 이름이 바뀐 것은 선덕여왕 5年인 636年].

가 아니더라도 겨운 절 이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꼭 가고 싶었는데,

막상 절에 당도하고 보니 듣던 대로 茶寺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법당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밭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밭에 그늘을 드리우는 편백나무[扁柏 :회목'檜木'이라고도 함]숲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편백[Hinoki Cypress, : 변하지 않는 사랑]-


효당만큼 이력이 다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승려이자, 3·1운동 때는 영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훗날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을 창설한 교육자,

다도인 등등이다.

-편백나무 삽화[扁柏木 揷畵 : illustration of Hinoki Cypress] -


1904年에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난 효당은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6年에 다솔사로 출가한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쇼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박렬의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돕고자 상하이로 건너가 폭탄을 운반한다.

이 때문에 8個月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단재 신채호의 유고를 간행해 또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 뒤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으며,

해방 뒤에는 해인사[海印寺] 주지를 지내는 등

다양한 경력과 일화를 남기면서 60年 그의 나이 56歲를 분기점으로 하여

79年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로 회향한다.


그의 다도는 엄격했으며 차 맛은 짜기로 유명했다.

‘짜다’는 말은 다인들의 은어로 茶의 맛이 진하다는 뜻.

나그네가 극락암 선원장 명정스님에게서 들은 얘기다.

-Korean tea kettle over hot coal-


“탕관에서 물을 푸기 전에 선방에서 입정[入定:]'하듯 차 도구로 탁탁탁 치더군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돌리는데 찻잔에서 손을 뗄 때는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바쁜데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바쁘기는 뭐가 바빠.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것이지’ 하고 핀잔을 주더군요.

또 효당의 茶는 매우 짠데 마치 소태 같았습니다.”

-작설차-


효당은 다솔사 작설차[雀舌茶]'의 맛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末年에 그를 찾아온 다인들에게 어린 사미승 시절 노승에게서 들은 구전을 들려주며 회상하곤 했다.

다솔사 작설차 맛은 하동 화개 차나 구례 화엄사 차보다 나았다는데,

실제로 산지를 구별하여 차와 쇠고기를 넣고 같은 물에 끓여본 결과

화엄사 차를 넣은 쇠고기는 단단하고,

화개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부드러우며,

다솔사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흐물흐물 물러지더라는 것이다.

-가을 감나무-

가을 감 먼저 따서 나에게 보내주고

봄날 불쬐어 말린 작설도 여러 번 나누어 주었네
.....
맑은 향기, 한식 전에 딴 것인가

고운 빛깔, 숲 속의 이슬을 머금었는 듯

돌솥에 물 끓으니 솔바람 소리

자기 잔에 따르니 빙빙돌며 젖빛 꽃이 피어난다

-<송광 스님이 보내준 햇차에 감사하며>의 부분-

효당은 스스로

사천지역에서 自生하고 있는 야생차 씨앗으로 다솔사 후원에 茶院을 조성해

정제증차[精製蒸車]로 -上品茶를 반야로[般若露]’,

다음 등급을 ‘반야차’라고 이름 지어 보급했다는데

나그네는 지금 그 맛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남쪽 나라의 봄바람이 곱게 일렁이는데

차나무 숲 잎들은 뾰족한 부리 내미네

어린 삭을 가려내니 신령스러움과 통하고

그 맛은 이미 육홍점의 다경에 기록되었네

기창 사이에서 자주빛 싹을 가려내어

용병봉단의 모습만 헛되이 흉내 내었네

밤 고요하여 객들은 둘러 앉았는데

한 번 마신 운유차에 두 눈이 밝아진다.

당씨(黨氏) 집에서 잔일이나 하던 저 사람이

어찌 알겠나, 눈으로 다린 차가 이처럼 맑다는 것을


-매월당 김시습의 <작설>의 전문-

-작설차-

최근에 어느 시민단체에서 효당이 친일 변절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김 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효당의 북지황군위문사 활동이나

다솔사의 내선불교학술대회 개최는 항일 세력을 돕기 위한 협력 또는 위장이었다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일제 청산이라는 본질 자체를 흐리게 할 수도 있으므로 재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소설가/정찬주-

-법정스님과 소설가 정찬주-

茶道'란 한잔의 茶'로써 우주만류의 이치와 인간 생활의 예의를 체험 할 수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이치와 예의를 다 알고 마음과 행동이 안정된 사람이 茶人이라고 본다.

-감로다원/감로님'글에서-

눈을 떠 눈이 열리어

問이 터져 어간이 터져

귀가 트이어 귀문이 열리어

숨을 쉬어 숨구멍이 터져

계란이 병아리가 되

問이 터져 껍질이 터져

깨침이 돼 解說이라네.

道通이라네 見性이라네.

어느 것에도 제작을 봐

상우를 알아 제작인 구색을 알아

모든 不正은 상우 안 맞고

제곡이 못되어 설멋져 안타까와라.

멋을 알고 멋이 되고

구색이 맞고 가락이 된다.

羅代의 聖母는 차례를 하고

화랑을 낳아 갸륵하여라 멋지게 살도다.

멋은 大衆의 것 私有는 못돼

道가 되고 禮가 된다.

道는 신봉하는 것 禮는 행사하는 것

信은 참되고 알뜰하며 禮는 聖스러워!

알뜰한 禮는 범절이라네.

범절은 차례에서 오고

차례는 멋에서 난다.

멋은 茶에서 빛나고,

茶'는 멋에서 산다.

멋은 제 구색인 것 제작을 이루고

멋은 한없어라.

크고 넓고 깊고 奧妙[오묘]해

그 어느 것의 합算이 아니며

그 온건함을 말하느니

사람은 가도 예절은 살아

범절은 살아 반야바라밀이라

멋은 영원한 生命

터지고 깨치고 自由로워라

우리들 살림살이 멋진 살림살이

그 누구도 하질 못해 敬仰[경앙]일 뿐이지

花郞[화랑]'은 살아 있다.

멋의 넋을 이어 받은 四月獅子[4월사자]는

石窟庵[석굴암]'을 보라!

生命은 영원한 것 멋있어라.

維摩[유마]'의 오막살이 이러하단다.

모르고는 안돼멋을 모르고는

철몰라 못써 철이 나야지

사심은 망하고 공동의 멋은 살아라.

내사 좋아요!

茶 맛이 나는 좋아요!

순박한 그 맛은

내 멋을 자아내 내사 좋아요!

멋은 원효대사 아닌 밤중에

촉루도 마시고 創作[창작]'의 茶도 마시고

茶는 멋에서 나고

멋은 茶에서 산다

그는 確信[확신]이기에 위맹스럽고

正邪[정사]'는 빨라 대담코 용감코 슬기워라

멋은 어느 것에 나도

다른 用數를 허용 않으니

어떠한 조각이나 요사는 이룩되지 못해

茶 맛이 좋아 어쩐지 좋아

作爲[작위]'없이 질박한 것

情답고 마음에 들어

茶 맛은 써 좋아 떫어도 좋아

신 것이 달고 달아도 시어

짜잖은 것 싫어요, 내사 싫어요.

잔 솜씨 여러 양념 군맛이 싫어

구성없이 짜잖은 것 열없어 싫고

싱거우면 못써 간이 맞아야.

제 가락 제 구성에 제 청이라오

장단이 빠져선 안 돼 장단이 맞아야

가야금 열두 줄에 두리 둥덩실

우리 멋님 내리시나 신이 나는다.

얼싸 이것이 산이로구나.

산 사람 이로구나

멋있는 분이 산이로구나

멋진 대중이 산이로구나.

멋은 혼자서도 대중의 것

대중은 멋을 좋아하나니

멋없어 못 써 설 멋져 죽어

산이로구나. 멋의 大衆은

산이로구나. 열반이로구나.

-최범술, 韓國의 多道,[서울 寶蓮閣 , 1975-83-90면'에서-


Keemun (China Black)

茶道'란,

法道'에 맞게 茶'를 즐김으로써 삶의 이유와 사색을 추구하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茶道'를 단지 茶'를 다리고,

마시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러한 방식을 通해 정신적 고양을 꾀하여,

자연과 合一된 건전한 삶의 길을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감로다원/감로'님의 글-

어떤 규범이나 격식, 계층에 얽매임 없이 누구나 車'를 즐길 수 있다는

차도무문[車道武;門]'과 茶器'를 다루는 행위와 그 마음자세를 일컫는 '茶道用心'을 바탕으로 한

禪車 수행'을 확립한 효당스님은 79년 7월 10일 76歲의 나이로 입적했다.

-茶 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