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길도 윤선도유적지,,,세연정
윤선도가 보길도에 터를 잡은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었다.
당시 해남 집에 머물고 있던 그는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하였다.
당시 인조는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한때 대부가 되어 두 왕자를 가르쳤던 윤선도는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뱃길로 강화도를 향해
가고 있다가,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에 있던 두 왕자도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뱃길을 돌려 제주도로 향하였다. 치욕적인 소식에 더 이상 험악한 세상 꼴을 보지 않겠다는
생각에 청나라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섬에 가서 은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던 뱃길에서 태풍을 만났는데, 배가 표류한 섬이 바로 보길도였다.
당시 51세였던 윤선도는 아름다운 섬 보길도와 만나면서 화려한 시문학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모든 꽃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학문을 즐겨 익힌 윤선도와 아름다운 절경의 보길도가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절창 ‘어부사시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다리,,,
멀리 보이는 곳이 노화읍 전경,,,세연정 가는길에,,,
고산 윤선도의 생애
1587(선조20)∼1671(현종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사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윤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30세 때인 1616(광해군8년) 성균관 유생 신분이었던 고산은 광해군의 총애를 입고 비행으로써 세도를 부리던 이이첨과 박승종, 유희분 등을 탄핵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그 내용이 아주 격력하여 대신이 모두 두려워 했고, 이이첨도 감히 발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공의 충직한 마음을 표출한 것이었으나 이로 인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했고, 부친도 관찰사 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이듬해 치욕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직의 위급함을 보고 우국충정에 불타던 공은 곧 향리 자제와 의병을 모집하고 가복(家僕)들을 거느리고 군량과 전함을 준비하여 불철주야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했다. 익년 1월 29일에 강도 앞 바다에 도착하니 강도(江都)는 이미 침략된 뒤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공은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일단 귀향했다. 다시 대가(大駕)의 세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바로 배를 탐라로 향하게 했다. 항해 중에 심한 풍랑으로 제주를 가지 못하고 보길도에 상륙했다. 보길도(甫吉島)에 정착한 고산은 정착지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고금영)>·<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4년에는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60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의 간척지를 제방 농토로 개척하여 양 군 10개 마을 농어업인에게 무상 배여하기도 하였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 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18년의 유배생활과 20여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 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고산(孤山)의 보길도 생활은 정축년(丁丑年)(공51세, 인조15년, 1637) 2월 입도(入島)한 이래 85세 6월 부용동 낙서재에서 장구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차<1차(51세 2월∼52세 6월, 1년 5개월), 2차(56세, 잠시 유람), 3차(60세∼62세, 3년), 4차(64세∼66세 1월, 2년 1월), 5차(67세 2월∼68세, 23월), 6차(71세 2월∼8월, 7개월), 7차(81세 9월∼85세 6월, 3년 10월)>에 걸쳐 총 12년 11개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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