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양산 오봉산,,,임경대(3/31)

삼무강천 2012. 4. 2. 11:32

1000년 전 최치원 선생의 행적을 찾아 임경대를 찾았다.

임경대가 어딘가하고 궁금했었던 바다.

문헌을 찾아보니 임경대가 다섯곳이나 있다.

그 중에서 문헌상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아보려고 한다.

아쉽게도 경부선 철도 부설로 실제의 임경대가 없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것을 빼고 나면 첫째, (신)임경사-예전 경감암-자리. 둘째,현재의 임경대 정자가 있는 자리.셋째,물금에서 화제리쪽으로 1022 지방도를 따라가면

원동면 경계지점에서 200M되는 곳으로 부산에서 원동으로 향하다가 임경대 정자가 있는 곳 조금 못미친 곳에서 낙동강변으로 내려가면 있는 곳이다.

임경대(臨鏡臺),일명 최공대(崔公臺)라고 하는데 황산강(현재의 낙동강) 서쪽 절벽위에 있고 고운 최치원이 놀고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벽에는 고운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무너지고 벽서(壁書)는 후인이 황산루에 옮겨 적었다. 이것마저 이제는 남아 있지 않고 시만 전할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조에는 '황산역 서쪽 절벽 위에 최치원이 노닐며 자연을 감상하던 곳이 있다(在黃山驛西絶壁上崔致遠遊賞之地)'라고 적혀 있으니

 사람들은 이곳으로 추증한 것이다. 최치원의 임경대시와 김극기의 차운은 각각 이러하다.

고운 최치원의 시는 이러하다.

안개 속에 산은 빽빽이 늘어서고 물은 질펀히 흐르는데, / 거울같은 물 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와 마주하고 있네. / 외로운 배는 바람에 실려 어디로 갔나? / 새는 별안간 날아가 아득하여 자취도 없네.(煙巒簇簇水溶溶, 鏡裏人家對碧峰. 何處孤帆飽風去 瞥然飛鳥杳無종)

밝은 강물 거울 같아 푸르고도 넓은데, / 수면에 비친 외로운 마을 어지러운 봉우리를 등졌네. / 고기잡이 노래 한 마디에 하나의 앞사귀 배, / 푸른 버들 깊은 곳에 사람의 자취도 없네.(澄江瀉鏡碧 溶, 面水孤村背亂峯. 漁唱一聲舟一葉, 綠楊深處少人)

 

풍류인답게 최치원은 현존하는 묘소가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행적은 상당히 많다.부산과 부산인근의 경우 너무나 유명한 해운대와

최치원이 지리산으로 가기 전 낚시터인 용원의 청룡대각석靑龍臺刻石도 있고 지금 언급하려는 임경대가 있다.

임경대臨鏡臺의 중간 글씨인 "경鏡"을 보면 최치원의 천재성이 드러난다.경치를 뜻하는 경치 경景자가 아니다.거울 경鏡자를 쓰고 있다.

유장하게 소리없이 흐르는 낙동강물을 거울로 본 것이다.무엇을 비춘 거울이겠는가? 내 생각엔 달을 비춘 거울로 해석하련다.

낙동강만한 거울이라면 달 정도는 비추어야 제멋인 것이다.기어코 나는 오늘 임경대를 찾아서 풍류산행의 풍월주 역할과 풍류도의 시자 노릇을 하련다.

펌~~~

▲들머리인 용국사

 

 

 

▲용국사에서 20분 남짓 올라오면(좀가파른 길) 바로 능선이다.

처음에는 오봉산으로 갈 생각을 안해 지도 준비도 못했다. 네비에도 나오지 않고~들머리 찾는다고 2시간을 해맸다.

오후에 서울에서 형님이 내려와 KTX(울산역)에 마중을 하러 가야하기 때문에,,,정상으로 가기엔 시간이 없고

처음부터 최치원 선생의 낙동강 풍류를 즐겼다는 임경대를 보고싶어 왔기에

정상은 포기하고 곧바로 임경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완연한 봄인것 같다. 진달래가 반갑게 피었다.

▲반대쪽 능선,,,오봉산 정상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멀지않은 시간에 꼭한번더 와야할것 같다.

▲이정표에는 800m라고 되어 있는데 실거리는 그 보다도 짧은것 같다. 10분정도 걸린것 같다.

생각하고 온 것이(?)없다. 이정표는 임경대라고 쓰여있는데 아무런 표시도 없고,,,실망 ,,,조망은 좋다.

 

 

 

 

 

 

 

 ▲이 곳이 임경대라는 이정표를 따라온 곳인데 낙동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풍경이 압권이다.

그리고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 같은데 아무런 표시가 없다.

▲몇해 전만 해도 저렇게 간단한 설명서라도 있었는것 같은데~

 

 

 

 

 

 

 

 

 

※ 최치원 (崔致遠/ 857˜?)


ㅇ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 신라 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당의 과거에 급제.

ㅇ 당나라말기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치다가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