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은 흐르고,,,의기 논개의 혼이 서려있는...촉석루
촉석루(矗石樓)는 경남 진주시 진주성 안, 남강을 바라보고 있는 멋진 누각이다.
밀양 영남루,평양의 부병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
누각 자체도 멋지고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의 풍경도 아름답다.
촉석루에 오르면 서까래에 걸려 있는 수많은 글들을 볼 수 있다.
모두 촉석루를 예찬한 문인들의 글이다.
이것만 보아도 촉석루가 얼마나 사랑을 받아온 누각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6.25 때 불탄 후 1960년 새로 건립된 건물이다.
전시에는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이곳에서 향시를 치루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촉석루는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불리기도 했다.
촉석루 아래 남강변에는 의암(義巖)이라는 작고 편평한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그 바위이다.
촉석루 앞으로 돌계단을 만들어 놓아 의암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촉석루 옆에는 의기사(義妓詞)가 있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데, 규모는 작은 편이다.
촉석루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제8호)
남강가 바위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이 누각은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으며, 전쟁중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고시장(考試場)으로 사용 되었다.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진주 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하였다.
촉석루에 오르면 진주를 감도는 풍류 한자락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강변에 솟은 촉석루 너른 대청에 서면 끊임없이 불어대는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둥실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이색 정몽주 이황 이언적 등 글을 안다는 선비들 중 촉석루에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이 없다.
촉석루 바로옆 의기사앞,,,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
이 의기사는 우리 역사상 유일한 여자를 위한 사당이다.
의기사 방명록에 서명을 하는 작은아들,,,
작은 용돈을 내고 묵념에 잠긴 자은아들,,,
산홍은 논개를 기리며 ‘그저 피리 불고 북 치며 땀 흘리는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는 시를 의기사에 남기기도 했다는데,,,
맞은편 정약용의 글과함께 산홍의 글을 보기만 하고(몰랐다)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아쉽다.
촉석루에서 의암으로 가는 계단 바로 밑에서,,,
의암이 있는 주의 경관,,,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경남 진주,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의 물살을 버티고 선 작은 바위 하나. ‘의암(義巖)’이란 이름을 가진 바위에 붙여진 싯귀다.
화려한 진주의 밤은 이제 곧 황홀한 야화로 더욱 빛을 발한다.
진주남강유등축제가 10월1일부터 14일까지 촉석루 앞 남강에서 진행된다. 유등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 고립됐던 민ㆍ관ㆍ군이
성밖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군사신호를 보내기 위해 강물에 띄워 보낸 등불에서 유래한다. 3만여 개의 수많은 등불이 강가에서
혹은 강물에 떠다니며 밤의 축제를 노래한다.
진주성 건너편 강변 둔치에는 1만8,000개의 소망등이 내걸린다.
개당 1만원을 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소중한 꿈의 등이다.
이미 1만5,000개는 예약이 완료됐고 현장에서 나머지 3,000개 등을 신청받아 불을 밝힌다.
배를 타고 등불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등배도 운영된다.
유등축제와 함께 3~10일에는 개천예술제가, 2~7일에는 진주전국민속소싸움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 논개 ♣
- 변영로 詩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 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
진주대첩을 승리하신 충무공 김시민장군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인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적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가 3개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 그리고 김시민장군의 진주성대첩이 그것으로써 이를 일컬어 임란 3대첩 이라 한다.
이 가운데 일본이 역사책에「 임진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 」 라고 기록할 정도로 참패했던 전투가 바로 진주성 전투였는데,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그 8배에 가까운 3만여명의 정예 왜군을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진주는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 낮에는 볼품없는 작은 도시의 풍경에 불과하지만, 해가 지고 성곽에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기 시작하면
고도 진주의 매력이 한껏 피어난다. 한 번 보면 쉽게 잊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논개(論介). 그 이름이 사주에 개 술(戌)자가 4개나 들었다 해서 ‘개를 놓았다(낳았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성이 주씨인지도, 또 그가 서당 훈장의 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전북 장수에서 났으며, 지금은 육십령을 넘어가는 경남 함양 땅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혀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초가을 저물녘. 소슬한 가을바람 속에 환하게 불을 밝힌 진주 남강의 촉석루 앞에 섰습니다. 촉석루에 서면 누구나 그렇듯 시간을 되짚어 논개를 떠올리게 됩니다. 치열했던 왜군과의 전투, 그리고 진주성의 함락과 성을 지키던 이들의 죽음. 이어 승전한 왜군들이 관기들을 끼고 벌이는 주연(酒宴). 그리고 열아홉의 논개의 비장한 죽음까지…. 논개의 영웅담은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실 논개의 영웅담은 너무도 완벽해서, 오히려 인간적인 훈김이 나지않는 ‘화석’과 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그의 죽음에 나라사랑, 혹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선동의 냄새’까지 살짝 더해지면 이런 느낌은 더합니다. 꽃다운 열아홉의 나이와 피 비린내나는 전쟁. 과연 무엇이 그를 남강의 푸른 물로 뛰어들게 했을까요. 그가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여행은 공간으로서의 목적지가 아니라, 논개라는 인물을 목적지 삼아서 떠납니다. 논개가 몸을 던진 경남 진주의 남강도, 그가 태어났다는 전북 장수의 주촌마을도, 그의 묘가 있다는 경남 함양도 모두 돌아봤지만, 닿고자 하는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논개는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실(史實)과 전설이 뒤엉켜서 혼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논개는 ‘야담’에 등장하는 인물이어서 기생이었다, 아니었다 말도 많고, 출생지나 묘의 진위를 놓고도 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일테고, 여행자들은 그저 사실과 전설이 전해지는 대로 그의 행로를 따라 밟을 뿐입니다.
자료와 책을 뒤지고 그 지역의 향토학자들을 만나가며 논개의 행로를 밟으면서 알아낸 것은 그의 죽음이 ‘피끓는 투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처연하고 또 안쓰러운 것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시절 돈에 팔려갈 뻔한 자신을 거두어줬던 지아비에 대한 사랑과 헌신, 또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지아비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절개. 논개가 시퍼런 남강에 뛰어들면서 지키려 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쯤에서는 화석속에 가두어진 영웅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인간적이고 애틋한 한 여자로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논개를 따라가는 여행. 그 여행은 논개의 삶의 행로를 되밟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행에서 덧붙여 깨달은 것은 ‘여행의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여행지에서 토막토막 만나는 유적지들은, 그것 자체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것이 영웅담에 가깝다면 더 그렇습니다. 그 앞에 내가 서본들, 자녀들을 세워본들 심드렁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이 말을 ‘방법을 바꾸면 내용이 달라진다’로 바꾸어보겠습니다. 비록 ‘햇볕에 떠오르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말처럼 그 역사와 신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디쯤에선가 가슴이 턱 막히는 감동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진주·함양·장수=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경남 진주는 되도록 밤에 들어서는 것이 낫다. 고속도로를 내려서 남강을 끼고 달리다 진주성의 장쾌한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진주성의 성벽을 따라 켜진 은은한 불빛은 밤 늦도록 남강에 어른거리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빛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경에 말을 잊는다.
불빛이 일렁이는 남강변으로 내려서는 것도 좋지만, 진주성의 야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진주성의 강 건너편을 따라 조성된 대숲을 거니는 것이 제격이다. 바람에 서걱이는 대숲에 들어서 강건너 진주성의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성곽의 모습이 마치 꿈인 듯싶다. 그 대숲 길을 천천히 거닐어도 좋고, 강변쪽으로 난 숲의 벤치에서 불빛에 젖은 강물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낮이라고 진주성의 아름다움이 덜할까. 밤의 진주성 느낌이 ‘화려함’으로 요약된다면, 낮의 진주성은 잔잔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촉석루의 빼어난 자태와 그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고요한 남강은 한시와도 같은 분위기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의 소박한 분위기도 좋고, 논개가 적장을 안고 뛰어들었다는 의암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감회를 새롭게 해준다.
촉석루 아래쪽 문을 지나 바위 끝으로 내려서 의암 앞에 서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남강의 물살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여기서 열아홉살의 논개는 적장을 끌어안고 몸을 던졌으리라. 이곳저곳을 돌아본 뒤에 안 것이지만, 논개는 사실 애국적 정열로 가득한 여장부가 아니라, 자신을 거두어준 지아비의 죽음을 따라간 가냘픈 순정의 여인네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에서 고개들어 현판을 읽다
촉석루 바로 곁에는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인 의기사가 붙어있다. 여기서는 자칫 지나치기 쉬운 현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의기사를 마주보고 오른쪽에 걸려있는 현판은 다산 정약용이 촉석루에 올랐다가 남긴 글이다. 논개가 목숨을 끊은 지 24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다산은 논개가 목숨을 던진 나이와 똑 같은 열아홉살때 장인과 함께 촉석루에 들렀다가 이 글을 썼다. 다산은 논개의 사당 앞에서 “지금도 사당에 아름다운 영혼이 남아있는 듯, 삼경에 촛불 켜고 술을 올린다”고 적었다.
왼쪽에는 한시가 적힌 작은 현판이 있다. 이 현판에는 당대를 풍미했다는 진주의 명기 산홍이 지은 시가 적혀있다. 진주 기생이던 산홍은 1906년 을사오적 중의 한명인 이지용이 돈을 싸들고 와 첩이 돼줄 것을 요청하자, “천한 기생의 신분이지만,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느냐”며 거절한 뒤, 폭행을 당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산홍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의기사를 찾아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그저 놀고만 있을 뿐/…”이라고 시를 적었고, 그 시가 바로 현판에 걸려있다. 산홍(山紅)이란 두 글자는 지체 높은 권문세가들이 이름을 올린 촉석루 벼랑에도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산홍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벼랑에 누군가 정성껏 새겨놓은 것이지 싶다. 그가 첩이 되길 거부했던 매국노 이지용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바위 반대쪽에 새겨진 것은, 아마도 이름을 새긴 이의 배려였으리라.
# 논개의 역사 혹은 전설…전북 장수의 생가를 찾다
논개의 생애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자면 그가 난 곳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 순서겠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이곳에 논개가 태어났다는 생가지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수몰돼 새로 복원했다는 생가도 번듯하게 들어서있다. 생가지에는 기념관과 연못, 비각, 논개 동상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지 뒤편의 마을들은 모두 운치 있는 한옥들이어서 정취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곳이 진짜 논개의 생가일까.
논개는 사실 ‘야담’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시 부시장쯤 되는 한성좌윤과 이조참판 등을 지냈던 유몽인. 그가 펴낸 ‘어우야담’에 논개의 이야기가 처음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삼남지방의 어사였던 그는 진주성 전투의 참상을 조사하러 진주를 방문했고, 논개의 이야기를 전해들어 이를 ‘어우야담’에 적었다. 그러나 책에는 논개가 몸을 던진 사실만 언급됐을 뿐, 출신지며 성장과정 등과 관련한 아무런 단서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논개 생가가 있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논개 사후 207년이 지난 1800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담겨있다. 이 책에 논개의 출생지에 대한 단서가 처음으로 비친다. 이 책에는 “기생 논개는 장수 사람인데, 최경회가 좋아했으며, 그를 따라 진주로 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논개 사후 200여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라 정확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이후 ‘호남삼강록’‘호남읍지’ 등을 통해 논개의 출생지는 차츰 구체화됐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 생가로 지목된 것은 향토사학자들이 전해오는 기록과 구전 등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인 셈이다.
# 382년만에 찾아낸 논개의 묘소…진짜 그가 묻혀 있을까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 그곳에 논개 묘가 있었다. 논개가 남강에 몸을 던진 지 382년이 지난 1975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논개 묘는 애초에는 ‘전(傳) 논개 묘’였다. 말 그대로 ‘논개의 묘로 전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묘역이 단장되면서 ‘논개 묘’가 됐다. 논개의 묘는 높게 돋워진 구릉 위에 있었다. 77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논개의 묘가 펑퍼짐한 형태로 앞에 서있고, 뒤편에 봉긋하게 솟은 최경회의 묘가 있다. 고향 땅인 전북 장수도 아니고, 그가 죽은 경남 진주 땅도 아닌 이곳에 왜 논개의 묘가 있을까. 거기다가 왜 최경회의 묘가 함께 있는 것일까.
논개의 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저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논개의 시신을 남강의 여울이 얕아지는 지수목에서 건져내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운구하다가, 육십령 아래 묻었다는 것이다.
논개와 함께 묻힌 최경회는 논개의 고향인 장수 현감을 지냈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 나섰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 그는 장수 현감 시절에 민며느리로 팔려갈 위기에 처했던 논개를 거둔 뒤, 이때의 인연으로 논개를 첩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논개가 최경회의 첩이었다는 사실은 1748년 우참찬 권적이 임금에게 최경회에 대한 포상을 건의하는 ‘태상시장록(공적서)’에 논개를 최경회의‘천첩(賤妾)’으로 기록한 데서도 확인된다. 역시 수백년 뒤의 기록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근거로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논개의 죽음은 ‘기녀의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진주성 싸움에서 지아비를 잃은 여인네의 슬픔과 원한으로 해독된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최경회의 뒤를 따라, 지아비의 원수인 왜군을 끌어안고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그의 죽음의 의미야 퇴색될까.
# 햇볕에 떠오르면 정사요, 달빛에 잠기면 야사가 되거늘…
논개의 여정을 짚어보자면 ‘햇볕에 떠오른’ 역사와 ‘달빛에 잠긴’ 야사와 함께 근대·현대 역사가 교차된다. 특히 진주성 일대며 전북 장수의 유적지 등에는 전직 대통령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과 최경회, 김천일 등의 신위를 모신 진주성 성내의 창렬사에는 5·16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이름을 새긴 표지가 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진주성 싸움에서 성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은 이름 없는 장수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했고, 이 표지는 이를 기념한 것이다. 이에 앞서 진주 촉석루에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장사(壯士)와 가인(佳人)을 두고 길다, 짧다 누가 말하랴/…”라며 창렬사 앞에서 심경을 읊었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전북 장수의 의암사에 걸린 현판 글씨는 함태영 전 부통령의 친필이다.
장수의 논개 생가지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 ‘아미정’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현판 글씨가 걸려 눈길을 끈다. 전 전 대통령이 지난 1983년과 1986년 두차례에 걸쳐 논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특별지시로 예산을 교부해줬다는 이유로 장수군은 생가지 조성작업을 하면서 1999년 이 글을 받아 걸었다. 아무래도 논개의 생가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고 한때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철거 논의도 있었지만, 현판은 지금도 굳건히 걸려 있다.
친일 시비가 있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영정은 아직 진주의 의기사와 장수의 의암사에 걸려있다. 진주시와 장수군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논개 표준영정 사업이 오는 연말쯤이면 마무리돼 새로 제작된 표준영정이 내걸리게 된다. 표준영정은 논개 영정 공모전 최우수작인 윤여환 충남대 회화과 교수의 작품을 수정, 보완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연말쯤 확정될 예정이다.
장수·진주·함양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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