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진주는 되도록 밤에 들어서는 것이 낫다. 고속도로를 내려서 남강을 끼고 달리다 진주성의 장쾌한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진주성의 성벽을 따라 켜진 은은한 불빛은 밤 늦도록 남강에 어른거리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빛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경에 말을 잊는다.
불빛이 일렁이는 남강변으로 내려서는 것도 좋지만, 진주성의 야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진주성의 강 건너편을 따라 조성된 대숲을 거니는 것이 제격이다. 바람에 서걱이는 대숲에 들어서 강건너 진주성의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성곽의 모습이 마치 꿈인 듯싶다. 그 대숲 길을 천천히 거닐어도 좋고, 강변쪽으로 난 숲의 벤치에서 불빛에 젖은 강물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낮이라고 진주성의 아름다움이 덜할까. 밤의 진주성 느낌이 ‘화려함’으로 요약된다면, 낮의 진주성은 잔잔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촉석루의 빼어난 자태와 그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고요한 남강은 한시와도 같은 분위기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의 소박한 분위기도 좋고, 논개가 적장을 안고 뛰어들었다는 의암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감회를 새롭게 해준다.
촉석루 아래쪽 문을 지나 바위 끝으로 내려서 의암 앞에 서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남강의 물살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여기서 열아홉살의 논개는 적장을 끌어안고 몸을 던졌으리라. 이곳저곳을 돌아본 뒤에 안 것이지만, 논개는 사실 애국적 정열로 가득한 여장부가 아니라, 자신을 거두어준 지아비의 죽음을 따라간 가냘픈 순정의 여인네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에서 고개들어 현판을 읽다
촉석루 바로 곁에는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인 의기사가 붙어있다. 여기서는 자칫 지나치기 쉬운 현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의기사를 마주보고 오른쪽에 걸려있는 현판은 다산 정약용이 촉석루에 올랐다가 남긴 글이다. 논개가 목숨을 끊은 지 24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다산은 논개가 목숨을 던진 나이와 똑 같은 열아홉살때 장인과 함께 촉석루에 들렀다가 이 글을 썼다. 다산은 논개의 사당 앞에서 “지금도 사당에 아름다운 영혼이 남아있는 듯, 삼경에 촛불 켜고 술을 올린다”고 적었다.
왼쪽에는 한시가 적힌 작은 현판이 있다. 이 현판에는 당대를 풍미했다는 진주의 명기 산홍이 지은 시가 적혀있다. 진주 기생이던 산홍은 1906년 을사오적 중의 한명인 이지용이 돈을 싸들고 와 첩이 돼줄 것을 요청하자, “천한 기생의 신분이지만,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느냐”며 거절한 뒤, 폭행을 당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산홍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의기사를 찾아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그저 놀고만 있을 뿐/…”이라고 시를 적었고, 그 시가 바로 현판에 걸려있다. 산홍(山紅)이란 두 글자는 지체 높은 권문세가들이 이름을 올린 촉석루 벼랑에도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산홍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벼랑에 누군가 정성껏 새겨놓은 것이지 싶다. 그가 첩이 되길 거부했던 매국노 이지용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바위 반대쪽에 새겨진 것은, 아마도 이름을 새긴 이의 배려였으리라.
# 논개의 역사 혹은 전설…전북 장수의 생가를 찾다
논개의 생애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자면 그가 난 곳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 순서겠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이곳에 논개가 태어났다는 생가지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수몰돼 새로 복원했다는 생가도 번듯하게 들어서있다. 생가지에는 기념관과 연못, 비각, 논개 동상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지 뒤편의 마을들은 모두 운치 있는 한옥들이어서 정취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곳이 진짜 논개의 생가일까.
논개는 사실 ‘야담’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시 부시장쯤 되는 한성좌윤과 이조참판 등을 지냈던 유몽인. 그가 펴낸 ‘어우야담’에 논개의 이야기가 처음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삼남지방의 어사였던 그는 진주성 전투의 참상을 조사하러 진주를 방문했고, 논개의 이야기를 전해들어 이를 ‘어우야담’에 적었다. 그러나 책에는 논개가 몸을 던진 사실만 언급됐을 뿐, 출신지며 성장과정 등과 관련한 아무런 단서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논개 생가가 있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논개 사후 207년이 지난 1800년 발간된 ‘호남절의록’에 담겨있다. 이 책에 논개의 출생지에 대한 단서가 처음으로 비친다. 이 책에는 “기생 논개는 장수 사람인데, 최경회가 좋아했으며, 그를 따라 진주로 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논개 사후 200여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라 정확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이후 ‘호남삼강록’‘호남읍지’ 등을 통해 논개의 출생지는 차츰 구체화됐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 생가로 지목된 것은 향토사학자들이 전해오는 기록과 구전 등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인 셈이다.
# 382년만에 찾아낸 논개의 묘소…진짜 그가 묻혀 있을까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 그곳에 논개 묘가 있었다. 논개가 남강에 몸을 던진 지 382년이 지난 1975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논개 묘는 애초에는 ‘전(傳) 논개 묘’였다. 말 그대로 ‘논개의 묘로 전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묘역이 단장되면서 ‘논개 묘’가 됐다. 논개의 묘는 높게 돋워진 구릉 위에 있었다. 77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논개의 묘가 펑퍼짐한 형태로 앞에 서있고, 뒤편에 봉긋하게 솟은 최경회의 묘가 있다. 고향 땅인 전북 장수도 아니고, 그가 죽은 경남 진주 땅도 아닌 이곳에 왜 논개의 묘가 있을까. 거기다가 왜 최경회의 묘가 함께 있는 것일까.
논개의 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저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논개의 시신을 남강의 여울이 얕아지는 지수목에서 건져내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운구하다가, 육십령 아래 묻었다는 것이다.
논개와 함께 묻힌 최경회는 논개의 고향인 장수 현감을 지냈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 나섰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 그는 장수 현감 시절에 민며느리로 팔려갈 위기에 처했던 논개를 거둔 뒤, 이때의 인연으로 논개를 첩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논개가 최경회의 첩이었다는 사실은 1748년 우참찬 권적이 임금에게 최경회에 대한 포상을 건의하는 ‘태상시장록(공적서)’에 논개를 최경회의‘천첩(賤妾)’으로 기록한 데서도 확인된다. 역시 수백년 뒤의 기록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근거로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논개의 죽음은 ‘기녀의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진주성 싸움에서 지아비를 잃은 여인네의 슬픔과 원한으로 해독된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최경회의 뒤를 따라, 지아비의 원수인 왜군을 끌어안고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그의 죽음의 의미야 퇴색될까.
# 햇볕에 떠오르면 정사요, 달빛에 잠기면 야사가 되거늘…
논개의 여정을 짚어보자면 ‘햇볕에 떠오른’ 역사와 ‘달빛에 잠긴’ 야사와 함께 근대·현대 역사가 교차된다. 특히 진주성 일대며 전북 장수의 유적지 등에는 전직 대통령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과 최경회, 김천일 등의 신위를 모신 진주성 성내의 창렬사에는 5·16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이름을 새긴 표지가 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진주성 싸움에서 성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은 이름 없는 장수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했고, 이 표지는 이를 기념한 것이다. 이에 앞서 진주 촉석루에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장사(壯士)와 가인(佳人)을 두고 길다, 짧다 누가 말하랴/…”라며 창렬사 앞에서 심경을 읊었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전북 장수의 의암사에 걸린 현판 글씨는 함태영 전 부통령의 친필이다.
장수의 논개 생가지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 ‘아미정’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현판 글씨가 걸려 눈길을 끈다. 전 전 대통령이 지난 1983년과 1986년 두차례에 걸쳐 논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특별지시로 예산을 교부해줬다는 이유로 장수군은 생가지 조성작업을 하면서 1999년 이 글을 받아 걸었다. 아무래도 논개의 생가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고 한때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철거 논의도 있었지만, 현판은 지금도 굳건히 걸려 있다.
친일 시비가 있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영정은 아직 진주의 의기사와 장수의 의암사에 걸려있다. 진주시와 장수군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논개 표준영정 사업이 오는 연말쯤이면 마무리돼 새로 제작된 표준영정이 내걸리게 된다. 표준영정은 논개 영정 공모전 최우수작인 윤여환 충남대 회화과 교수의 작품을 수정, 보완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연말쯤 확정될 예정이다.
장수·진주·함양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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